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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매년, 약 4천만 명이 시청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컬' 시상식인 아카데미가 6일 앞으로 다가왔다. 타국의 행사지만 그 결과에 관심이 가는 것은 이 시상식이 영화 산업의 중심지인 미국 영화의 한 해 성취와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행사적인 측면에서도 쇼비즈니스의 결정체로 불릴 만큼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제97회 아카데미 수상작 선정 투표는 지난 18일 마무리됐다. 업계에서는 예년보다 빠른 투표 마감일이 시상식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카데미 시상식 전 열리는 유수의 시상식 결과는 아카데미 위원(AMPAS)들의 투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올해는 미국 배우 조합원들이 투표하는 배우 조합상(SAG) 시상식이 열리기 전 이미 오스카 투표가 마감돼 (적어도 배우상 부문은) 앞선 수상 결과가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상 구도는 어느 정도 윤곽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작품상 후보에는 총 10편의 영화가 올랐지만 분위기상 '아노라', '브루탈리스트', '콘클라베', '에밀리아 페레즈' 4파전이다. 오스카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브루탈리스트'(드라마 부문)와 '에밀리아 페레즈'(뮤지컬·코미디 부문)가 작품상을 양분했으며, 크리틱스 초이스에서는 '아노라'가 작품상을 가져갔다. 영국 아카데미(BAFTA) 시상식에서는 '콘클라베'가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미국감독조합(DGA) 시상식과 미국제작자조합(PGA) 시상식에서는 '아노라'가, 미국배우조합(SAG)상 최고상은 '콘클라베'가 가져갔다.
지난해 '오펜하이머'처럼 압도적인 1강이 보이지 않은 만큼 수상 예측은 쉽지 않다.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각축의 양상이다. 각 작품의 장단점을 짚어보고, 주관적인 예측까지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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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노라', 성 노동자의 일장춘몽으로 본 현대 사회의 계급성
작품소개: 허황된 사랑을 믿고 신분 상승을 꿈꾸며 러시아 재벌2세와 결혼한 아노라(미키 매디슨)가 남편 이반의 가족의 명령에 따라 둘을 이혼시키려는 하수인 3인방에 맞서 결혼을 지켜내기 위해 발악하는 이야기.
제7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아노라'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난해 가장 뛰어난 영화 중 한 편이다. 2000년 '포 레터 워즈'로 데뷔해 '텐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으로 이름을 알린 션 베이커 감독은 이민자와 성소수자, 성노동자 등 사회에서 외면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다뤄왔다.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경쾌한 유머와 쉴 새 없는 수다로 풀어내며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도 돋보인다.
성노동자 애니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단 하룻밤에 산산조각 나는 소동극을 통해 자본주의의 민낯과 부조리, 현대 사회의 계급성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아노라'는 션 베이커 감독의 집요한 영화 세계를 집대성한 최고작이다. 웃기고, 슬프며, 날카롭고 서늘하다.
아카데미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에게 작품상을 안긴 것 역사상 단 두 차례뿐이다. 첫 번째는 1956년 델버트 만 감독의 영화 '마티', 그리고 두 번째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10일간의 컴페티션인 칸영화제와 달리 아카데미는 수개월간 진행되는 레이스다. 또한 9명의 심사위원이 투표해 수상작을 가리는 칸과 달리 아카데미는 약 9천 명의 위원이 투표한다. 독립영화계에서부터 자신만의 색깔을 확립하며 미국의 젊은 거장으로 떠오른 션 베이커가 황금종려에 이어 오스카까지 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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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탈리스트', 전반부는 수작 후반부는 범작
작품소개: 전쟁의 상처와 흔적에서 영감을 받아 혁신적인 디자인을 창조해 낸 천재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한 인물의 인생 역경을 그린 대서사시라는 점에서 올해 작품상 후보 중 가장 '아카데미 취향 저격' 영화로 보인다. 시대극, 대작, 휴먼 스토리 3박자가 맞아떨어진다. 여기에 예술과 인간, 자본과 권력, 이념과 현실의 충돌까지 아우르며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한다. 또한 형식적으로 프롤로그와 1부(도착의 수수께끼), 인터미션, 2부(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와 에필로그로 영화를 구성하고 비스타비전 70mm 필름 촬영을 통해 클래식 미학을 추구한 브레디 코베 감독의 야심도 돋보인다.
근래 아카데미 후보 중에서 보기 드문 거작이지만, 작품상을 탈만큼 빼어난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인터미션을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의 완성도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파괴와 재건이 건축의 기초이자 핵심인 것처럼 시련과 인내를 딛고 일어서는 토스의 역경을 그린 전반부는 수작이지만 밴 뷰런과 토스의 갈등, 토스의 말년을 그린 후반부와 에필로그는 급전개와 축약 및 생략으로 인해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지레 관람을 포기한 회원들도 다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실적으로 아카데미 위원들이 후보에 오른 모든 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고, 영화를 보지 않고 투표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작품은 미국에 정착한 유대계 이민자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파헤친다. 그간 아카데미는 자국의 야만성을 드러내고 착취의 역사를 다룬 영화들을 외면(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이 마틴 스콜세지와 그의 영화들)해왔다. 다만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집단인 유대인의 불굴의 인생사를 다룬 작품이기에 아카데미 위원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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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클라베', 정치 스릴러로 풀어낸 우리 시대 리더의 자격
작품소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톨릭의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시스템으로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단의 선거회)의 은밀한 세계 뒤에 감춰진 다툼과 음모, 배신을 파헤친 스릴러.
'콘클라베'는 정직한 제목 때문에 지루한 종교 영화의 분위기가 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교황 선출 과정을 정치 스릴러 장르로 풀어낸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선거를 총괄하는 단장인 로렌스는 킹메이커인 동시에 왕의 될 위기에 처한 인물로 등장한다. 교황을 다룬 영화와 콘클라베를 소재로 한 영화는 과거에도 있었다.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가 교황청의 신비주의와 엄숙주의를 깬 드라마였다면, '두 교황'은 종교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을 끌어냈고, '콘클라베'는 종교와 전쟁, 정치적 대립을 현재 진행형으로 담아냈다.
랄프 파인즈의 명연기를 중심으로 선거판이 휘청이는 몇 차례의 전복은 예측불가의 긴장감을 선사하고, 마지막 반전에서는 충격과 탄식으로 이어진다. "확신은 통합과 포용의 적, 의심과 손잡아라"라는 메시지는 설교조로 들릴 수도 있지만 '리더의 자격'을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는 이 영화의 날카로움은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명료한 메시지와 유려한 연출, 관록 넘치는 명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수작이다. 작품상 후보 중 호불호가 가장 적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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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아 페레즈', 과대 평가된 영화…주인공의 논란까지
작품소개: 여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갱단 보스와 아무것도 몰랐던 그의 아내, 그리고 새로운 삶을 선물할 변호사가 얽힌 아찔하고 파격적인 뮤지컬 영화.
프랑스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인 자크 오디아르의 첫 뮤지컬 영화. 범죄 드라마와 뮤지컬 요소를 혼합했다. '라라랜드', '위키드'와 같은 미국 뮤지컬 영화와는 느낌이 다르다. 쇼적인 볼거리를 내세운 본격 뮤지컬 영화라기보다는 드라마 내러티브 안에 뮤지컬을 녹인 경우다. 대부분의 뮤지컬 파트는 앙상블 무대가 아닌 독백과 방백으로 이뤄져 있으며 노래는 멜로디성이 두드러지기보다는 대사에 리듬과 멜로디를 가미해 읊조리는 느낌이다.
'에밀리아 페레즈'는 파워풀한 범죄물, 정체성 드라마, 얽힌 치정극 등이 혼재된 영화지만, 그 다채로운 이야기의 교통정리가 잘 된 편은 아니다. 특히 중반 이후의 구성이 아쉽다. 에밀리아로 거듭난 마니타스가 부성애, 성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설득력이 있지만, 반성과 참회라는 내면의 변화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은 채 NGO 활동가로 거듭나고 성녀로 추앙받게 되는 흐름은 급작스러워 공감하기 힘들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최다(13개) 부문 후보작인 '에밀리아 페레즈'는 최근 영화 외적인 이슈로 '뜨거운 감자'가 됐다. 트랜스젠더 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이 과거 자신의 SNS에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 게시물을 올린 것이 논란을 일으켰다. 북미 배급권을 넷플릭스가 획득하면서 아카데미 레이스에서 든든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주연 배우의 과거 행적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소수자가 소수자를 멸시한 이 행태는 '에밀리아 페레즈'의 주제를 완전히 거스른다.
* 받아야 하는 영화: '콘클라베'
* 받을 것 같은 영화: '브루탈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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