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금)

방송 프로그램 리뷰

[스브스夜] '꼬꼬무' 암호명 KT는 '김대중 전 대통령'…법적 처벌 0명 'KT 납치사건', 그 진실은?

김효정 에디터 작성 2020.11.20 01:17 수정 2020.11.20 09:40 조회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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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SBS연예뉴스 | 김효정 에디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KT 납치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19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암호명 KT 그리고 흑색 공작원'이라는 부제로 암호명 KT와 그를 납치한 납치범들에 대해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서 이야기꾼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은 이야기 친구로 이은형, 조정식, 김이나를 각각 초대했다. 그리고 이들은 47년인 1973년 무더운 여름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암호명 KT와 그를 쫓는 KT공작단. 공작단은 KT가 한 호텔에서 비밀 회동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납치하기 위해 대기했다. 항상 KT 곁에 있던 경호원이 마침 그와 동행하지 않았기에 공작단에게 비밀 회동 자리는 최고의 기회였다.

이를 모르는 KT는 22층 스위트룸에서 2명의 남자들과 만나 필담을 나눴다. 자신들의 대화가 도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약 1시간 후 스위트룸에서 나온 KT는 공작단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KT의 일행은 스위트룸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약 30분 후 KT를 찾기 위해 스위트룸에 찾아온 KT의 경호원에 의해 스위트룸에 감금된 이들은 풀려났고 이들은 KT가 옆 방에 있던 이들에게 붙잡혔다고 했다. 이에 경호원은 곧바로 옆방의 문을 열었으나 그곳에는 모두 사라진 채였다. 그리고 그 방에는 코를 찌르는 화약약품 냄새가 진동하고 여러 가지 증거품만이 남겨져 있었다.

급히 경찰을 부른 경호원. 일본 경찰들은 방에 남은 증거들을 수집했다. KT가 남긴 담배 파이프와 외투, 그리고 길이가 1m 정도 되는 속이 텅 빈 가방 2개, 13m 정도의 나일론 로프, 페노바르비탈(강력한 수면제-마를린 먼로가 먹고 사망한 수면제)이 담긴 드링크병, 제조사가 각기 다른 총알이 든 탄창, 그리고 피 묻은 휴지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 현장을 본 일본 경찰은 이 범죄에 일본 야쿠자가 가담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일본 야쿠자들이 탄창을 재활용해 썼던 것. 그리고 방에서는 북한 담배인 백두산이 또 하나의 증거로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KT를 태운 차량을 도쿄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KT는 공작원들의 구둣발에 밟힌 상태로 뒷좌석 바닥에 결박된 채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이 공작원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은 바로 첩보 세계의 거물, 한국의 제임스 본드. 007,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몸을 사리지 않는 육군 첩보부대. 북파공작원 출신의 현역 육군 대령 윤 씨였다.

윤 씨는 김신조 사건 이후 조직된 684 부대(실미도 부대)를 창설하고 지휘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납치를 의뢰한 이는 따로 있었다. 의뢰인은 당시 육군 부대장으로 윤 대령에게는 하늘 같은 상관이었다.

의뢰인은 오랜 시간 KT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 자위대 출신의 탐정까지 고용해서 그의 뒤를 밟았고. 그에 대한 조사만 수천 페이지에 달했다. 그리고 그는 73년 7월 19일 윤 대령을 불러 KT의 납치를 의뢰했다. 이에 윤 대령은 "대한민국에 해가 된다면 그냥 둘 수 없다. 조국을 위해서만 무엇이든 한다"라며 그의 뜻을 받들었다. 그리고 일본 야쿠자를 섭외했다는 의뢰인의 이야기에 "믿을 만한 사람들을 붙여달라"라고 요구했고, 이에 조직된 것이 바로 KT 공작단이었다. 이들은 총 9개 조로 나눠 활동을 했고 컨트롤타워는 바로 윤 대령이었다.

KT 납치 5시간 후 그를 태운 차량은 오사카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 윤 대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 남기고 온 것이 너무 많았던 것. 사실 현장에 남은 증거들은 일부러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남긴 것이 아닌 손발이 맞지 않은 상황에 감시조가 두고 온 것들이었다.

특히 감시조는 남기지 말아야 지문까지 남겼던 것. 일본 경찰은 역시 이 지문을 발견했고 지문 조회를 했다. 그 결과 유리잔에 남겨져있던 지문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대사관의 공무원, 1급 서기관의 지문이었다.

그리고 당일 호텔 주차요원은 당시 레이서들의 드림카로 불리던 N사의 스카이라인 차량을 포착했는데, 이 차량이 주차요금을 내지 않고 도주해 이상하다고 여긴 주차요원이 차량 번호까지 적어두었던 것이 밝혀졌다. 차량의 주인은 바로 한국 총영사관의 부영사였다. 이에 일본 경찰들은 혼돈에 빠졌다.

KT는 오사카에 도착해 열흘째 정박해있던 용금호에 실렸다. 선원들의 복장이 모두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던 이 배의 다름 아닌 중앙 정보주였고, 용금호는 바로 중앙정보부의 비밀 공작선이었다. 그리고 선원들의 정체는 바로 중정의 요원이었다. 또한 윤 대령의 정체는 1급 흑색 공작관(블랙 에이전트), 바로 비밀공작 요원이었다.

KT는 마치 미라처럼 온몸이 테이프로 감겨 용금호에 실렸다. 그리고 선원들은 KT의 테이핑을 다시 하자는 제안에 그의 얼굴에 붙은 테이프를 뜯었고 KT의 얼굴을 확인하고 충격에 빠졌다. 암호명 KT의 정체는 납치사건 발생 25년 후 대통령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던 것.

당시 영어 표기는 현재와 달라 ㄷ은 T로 표기했고, 이에 김대중의 암호명은 KT였다. 중앙정보부는 오랜 시간 그를 KT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며 감시했고 그에 대한 보고서는 수천 장에 달했다.

당시 국회의원 출신의 민간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왜 중앙정보부로부터 그러한 감시를 받았던 걸까?

납치사건 2년 전 1971년 47세였던 김대중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그리고 여당 후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지역감정 발생 이전 시대였던 당시 김대중은 전국구 인물이었고 이에 박정희와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불과 94만 표 차이로 패배하며 박정희는 3선에 올랐다.

금권 관권 선거 등 부정 선거가 비일비재했던 당시 박정희에게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던 것. 그리고 대선 전후로 김대중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생겨났다. 대선 기간 중 그에게는 폭발물이 배달되기도 했고, 대선이 끝난 후에는 14톤 트럭과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도 발생했다. 이 사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지팡이를 사용해야 했다. 그를 둘러싼 암살설 등 흉흉한 소문도 이어졌고 김대중은 다리 치료 겸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71년 대선 5개월 후 10월 유신 헌법으로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국회 해산, 정치 집회 금지 등이 선언되었고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되며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었다. 이에 1987년 대통력 직선제 개헌이 일어나기 이전까지는 우리 국민은 우리 스스로 대통령을 뽑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이 시기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유신 반대 운동을 펼쳤고 이는 정부에서는 눈엣가시였다. 이에 중앙정보부가 움직이게 되었던 것.

중앙 정보부장 이후락, 그리고 차장보 이철희, 이들이 임명한 공작 단장이 윤 대령이었고 그는 납치 18일 전 은밀하게 일본으로 출국해 납치를 주도했다. 특히 김대중은 얼마 후 미국으로 출국이 예정되어있었기에 일본에서의 공작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공작단은 급히 일을 진행했다.

KT 납치 이틀째 화물선 용금호가 출발했다. 그리고 그때 미국 대사관에서는 미국 CIA에 김대중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CIA는 그가 현재 대한 해협 위 배 안에 손발이 묶인 채로 잡혀있다는 보고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발은 밧줄로 양쪽을 묶어서 당기려고 해도 끄떡 않았다. 바다에 던질 계획을 하는데 솜이불을 붙여야 안 떠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상어가 먹기 좋다는 말도 하더라"라고 증언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내 목숨도 중요하지만 내가 죽으면 대신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국민을 위해서라도 나보다 더 좋은 대신이 나올 때까지 내 목숨을 살려달라고 부탁했다"라며 흐느껴 울었다.

배가 출발하고 얼마 안 된 그때 갑자기 배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용금호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갑자기 비행기가 용금호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선원들은 윤 대령이 용금호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더욱 비상상황에 빠졌다.

급히 윤 대령을 수소문하자 그는 "여권을 대사관에 맡겨놔서 출국이 어려웠다"라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이에 그의 상부에서는 빨리 일을 마무리하라고 회유했다. 그가 변심을 해서 어딘가로 망명을 해 KT공작에 대한 내용을 밝힌다면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던 것.

당시 상부는 윤 단장에게 KT공작계획으로 2가지 안을 제시했다. 1안은 야쿠자를 이용해 현지에서 KT를 제거, 2안은 비밀리에 한국에 데려오는 것. 그리고 이 중 어떤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윤 단장에게 선택을 미뤘다. 이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특히 윤 단장은 당시 공작원들이 모두 고위관리들의 조카, 사위, 아들 등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이들이었기에 이것이 잘못되면 혼자 독박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고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소란스럽던 배 안에서는 누군가가 TK에게 다가와 "선생님 이제 됐습니다"라고 귓속말을 했다. 이 말을 한 이가 누구인지 어떻게 그를 살릴 수 있었는지 여전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이 비행기를 보내서 자신이 살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르나 확인 결과 미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은 확실했다.

부산에 도착한 용금호에서 나온 김대중은 부산과 서울의 공작원들 아지트에 감금되어 있다가 납치 6일째 동교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다. 붕대로 그의 눈을 감은 공작원들은 "상부의 명령이다. 여기서 당신을 풀어주겠다. 차에서 내리면 벽을 보고 소변을 보라. 소변을 다 본 후에 집으로 들어가도 좋다"라고 일렀다.

그렇게 납치 129시간 만에 풀려난 김대중은 퇴근하는 가장처럼 자신의 집 초인종을 눌러 가족과 재회했다. 그리고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이상한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김대중의 조국을 배신하는 망국적인 해외 행각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그를 조국으로 데려왔다. 앞으로 어느 누구도 조국 밖에서 조국을 배신하는 자는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애국청년 구국 대라는 이름으로 쓰여있었다.

이에 당시 김대중의 납치 사건을 담당한 특별수사본부는 이 단체를 범인으로 몰고 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김대중 집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을 깔았다. 그들은 "또 납치될 수 있으니 나라에서 보호하겠다"라고 했지만 이는 언론과 사회 인사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엄청난 스케일의 수사를 펼쳤던 특별수사본부. 그러나 이와 다르게 그를 납치했던 용금호는 이름도 바꾸고 감금 장소는 매우는 등 새단장을 했고, 선원들의 입막음도 확실하게 했다.

그리고 납치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의 주인공은 사건 즉시 귀국했고, 이에 대한 수사를 요청하는 일본 경찰에는 정부가 이를 거절하고 1년을 끌다 그가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그가 받은 처분은 의심받을 일을 해서 품위를 떨어뜨렸다는 품위 유지 위반에 따른 해임뿐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다시 복직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또한 당시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는 "맹세코 나는 납치 사건과 관계가 없다. 아마 중정부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변명을 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4년 후 당시 중앙 정보부장 이후락은 기자회견을 통해 "국가 조직력이 개입했다 하는 것을 시인한 적 없다. 공권력 개입은 없었다"라고 단언했다.

또 그는 "납치 사건의 조사 내용은 소상히 알고 있지만 내용을 밝힐 수는 없다"라며 "한국에서 민비가 살해되고 진상이 밝혀진 것도 몇 년 전,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을 때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이 사건으로 KT공작의 총책임자였던 이후락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중앙 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훗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었는데 당시 그가 부정 축재한 재산은 194억,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200억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이후락은 "떡고물 안 만지고 떡을 만들 수 있냐"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KT공작사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었던 사건으로 법적 처벌을 받은 이는 0명, 사건을 은폐한 결과 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리고 사건 발생 31년 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가 조직되며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길 기대했으나 KT공작과 관련된 서류의 수발신 기록만 남아있을 뿐 내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당시 윤 대령은 "내가 KT공작단의 단장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다"라며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그리고 이에 국정원 과거사 진실 위원회는 "사과문을 쓴 이들이 그를 살려냈다. 명령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처음 지시와 달리 납치 후 그를 배에서 실어 보내 그를 살릴 수 있었던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또한 사건의 피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모두를 용서했다. 그는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다. 정치 보복은 나에게서 끝나야 한다.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끝끝내 이뤄지지 않았고 현재에도 진실을 아는 이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진실은 여전히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김이나는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국민을 얕잡아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대중의 심리를 다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이에 장항준은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과거 이 구절을 인용해 '펜이 침묵하면 돌들이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리라'라는 언론사들의 각성을 요구하던 문구들을 본 적이 있다"라며 안타까운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조정식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갔을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정치 활동을 한 것 아니냐"라고 감탄했다. 실제로 그의 납치는 유신 반대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1987년 개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은형은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시대만 바뀌고 또 같은 일어나지는 않기를 빈다"라고 했다.

끝으로 방송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역사는 결코 불의에 편들지 않는다. 역사를 믿는 이에게는 패배가 없다"라는 말로 이날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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