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2000년대 초반, 드라마를 즐겨봤던 시청자라면 지금의 배우 조현재가 낯설 수 밖에 없다. 꽃미남 세자로 등장해 시청자들로부터 “분량을 늘려달라”고 요청받았던 '대망'(2002)의 소명세자, 촉촉한 눈망울에 세상 가장 순한 얼굴을 하고 있던 '러브레터'(2003)의 안드레아 신부, 믿음직한 왕으로 거듭나 선화공주와의 사랑까지 이루었던 '서동요'의 서동(2005)까지. 당시 조현재는 줄곧 선역(善役)으로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조현재는 악역(惡役)과 밀접하다. 3년전 SBS '용팔이'에서는 무섭게 김태현(주원 분)과 한여진(김태희 분)을 옥죄던 악역 한도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더니, 최근 종영한 SBS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에서는 재벌가 출신 앵커로 완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뒤에서는 아내 지은한(남상미/이시아 분)을 무차별하게 폭행하는 사이코 성향의 강찬기 역할로 분해 다시 한 번 섬뜩한 악역 연기를 펼쳤다.
과거 착한 남자주인공을 주로 연기하던 조현재가 지금은 악역으로 더 익숙하다. 큰 눈에 미소는 여전히 선한데, 연기로 그 선한 웃음 뒤에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조현재는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캐릭터를 맡아 자기가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게 재미있단다. 연기경력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도전'과 '변화'를 꿈꾸는 그다. 두 드라마 연속 소화한 악역도 그런 생각에서 기인한 선택이었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이하 '그녀말')의 강찬기를 통해 인격장애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배경부터 악행의 폭주, 훗날 반성의 순간까지 촘촘한 연기력으로 표현하며, 악역이지만 시청자의 애정어린 반응을 이끌어냈던 조현재.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감과 동시에, 지난 3월 오랜 연인과 결혼해 남자로서도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그를 만났다.

Q. '그녀말'에서 보여준 악역 연기에 시청자 반응이 좋았다. 소감이 어떤가.
조현재: 호평이 정말 많더라. 감사하고 배우로서 행복감을 느낀다. 시청률도 높게 나왔다. 촬영할 땐 고되고, 캐릭터적으로 어려운 역할을 맡아 심적으로 힘들었지만, 끝나고 나서 결과가 좋으니 이게 행복이 아닌가 싶다. 힘들었던 게 싹 날아간다. 이번 강찬기 캐릭터는 새로운 걸 보여드리고 싶단 생각에 하게 됐다. 다음 작품에서도, 전에 제가 하지 않았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Q. 심적으로 힘들었다니, 아내를 때리는 폭력성 짙은 악역이라 심적 부담이 컸나 보다.
조현재: 강찬기의 감정 자체가 되게 어려웠다. 강찬기는 스스로 완벽한 남자라고 느끼는데, 지은한이라던지, 일적인 것이라던지, 자기 뜻대로 안되는 것에 실은 마음 졸이고 있을 때가 많다. 또 잔인하고 잔혹한 표현도 해야했다. 이런 면들을 계속 생각하다보니, 제가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루종일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압박감이 있었다. 이 캐릭터를 하는 동안은 그걸 계속 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Q. 드라마 종영 후 후유증이 심했겠다.
조현재: 끝나고 몸이 좀 아팠다. 촬영 강행군에 몸이 지치기도 했고, 심적으로 계속 부정의 감정을 갖고 있어야 해서, 그런 힘듦에서 온 게 아닌가 싶다.
Q. 처음 시놉시스를 봤을 때 강찬기가 이런 악역인 걸 알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
조현재: 배우로서 악역을 한다는 건 늘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사실 제가 어릴 적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못했다. 서른 중후반이 되어서야 악역에 도전하게 됐는데, 강찬기 같은 악역은 또 처음이었다. 가장 치명적이고 치졸한 역이라 생각한다. 기분 좋은 역할은 아니지 않나. 이걸 캐릭터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많이 노력했다.

Q. 캐릭터 연구는 어떻게 했나?
조현재: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데이트폭력 관련해서도 찾아봤다. 강찬기는 유전적인 요인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유년기에 과도한 강박 속에 자라 인격장애가 형성된 친구다. 굉장히 소름 끼치는 지점이 있다. 자기의 사랑은 지은한 하나이고, 그 밖엔 다 쓰고 버리는 물건처럼 여긴다. 그래서 지은한 외에 다른 건 감정을 갖고 바라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강찬기가 정수진(한은정 분)과 바람을 피워도, 그녀에게 감정은 없다. 그래서 한 순간도 한은정씨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강찬기는 소름끼치도록 냉혈한이라 생각했다.
Q. 어릴 적에 악역의 기회가 없었다는 건 착한 역할만 제안 받았다는 의미인가?
조현재: 그렇다. 악역을 하고 싶어도 그런 역할이 들어오지 않았다. 악역까지 아니더라도, 반항아나 액션을 하는 역할로 좀 더 강인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다.
Q. 2000년에 데뷔했으니, 내년이면 어느덧 경력 20년의 배우다.
조현재: 벌써 그렇게 됐다. 점점 더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 같고 세월 감각이 없어진다. 촬영현장에 가면, 대부분이 저보다 어리다. 카메라 감독님들 중에도 저보다 어린 분들이 많다. '아, 내가 나이 먹고 있구나'를 느끼지만, 촬영장에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던지, 그렇게 오히려 더 편해지는 부분도 있다.
Q. 2000년대 초반 꽃미남 외모에 선한 캐릭터로 인기가 대단했다. 지금도 '조현재 리즈시절'이란 이름으로 사진이 온라인에서 돌더라.
조현재: 드라마 '카이스트'가 데뷔작이었는데, 그 땐 연기를 못한다고 들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내가 봐도 정말 국어책 읽는 수준으로 말도 안 되게 연기를 못했다. 나이도 어렸고, 연기할때 긴장을 많이 했던 거 같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제 '리즈시절'이라하면, 드라마 '대망'의 소명세자 때가 아닌가 싶다. 주인공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아져서 끝날 땐 주인공처럼 주목받았다. 그 다음 작품이 '러브레터'였다. 안드레아 신부 역할을 하며 '남자지만 청순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 두 작품 모두 굉장히 선하고 여리여리한 캐릭터를 소화했다.

Q. 안드레아 신부의 아역이 유승호 아니었나.
조현재: 맞다. 당시 제 아역이었다. 그 친구가 지금 성장한 걸 보면 옛날 생각이 문뜩문뜩 난다. 제가 군대 가기 전 식당에서 우연히 승호와 마주친 적이 있다. 제게 와서 꾸벅 인사를 하더라. 어릴 적에도 예쁜 아이였는데, 지금도 꽃미남으로 잘 성장했다.
Q. '그녀말'에 함께 출연한 김재원도 그 당시 드라마 '로망스'를 통해 꽃미남 멜로 남자주인공으로 주가가 높지 않았나.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가 있었을 거 같다.
조현재: 재원이형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러브레터'가 '로망스' 후속작이었다더라. 이 시대를 같이 걸어가는 사람과 함께 연기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재원이형이 너무 좋았다. 같이 호흡하는 게 너무 감사했고, 함께 연기하는 자체가 정말 좋았다. 또 '그녀말'에서 어머니 역할로 나왔던 이미숙 선배님과는 2003년 제 첫 영화 '스캔들'에서 만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작품을 해서 든든하고 힘이 났다.
Q. 과거의 선한 캐릭터들과 지금의 악역들, 맡는 캐릭터들의 차이가 크다. 실제 성격은 어떤 편인가?
조현재: 절 잘 아는 사람들은 남자같은 면이 많다고 한다. 친구들은 “넌 선한 역할 말고 깡패역할을 해야한다”고 장난치기도 한다. 반면에 코믹을 하면 괜찮을 거 같다는 말들도 많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코미디 장르, 밝은 걸 꼭 해보고 싶다. 연기한지 2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안해본 게 더 많다. 코미디도, 멜로도, 악역도, 저한텐 모두 또 다른 시작이다. '그녀말'이 제가 다양한 걸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았나 싶다.
Q. 연기적인 변화에 대해 갈망이 있는 듯 하다.
조현재: 20대 후반 정도부터는 늘 변화하고 싶어 했다. 다른 작품들 다 거절하고, 변화하고 싶다는 생각에 영화 'GP506'를 선택했었다. 'GP506'은 잘 안됐지만, 거절한 작품들 중에 크게 성공한 작품이 두, 세개 있다. 당시의 명성과 부만 생각하면 아쉬운데, 천천히 멀리 보면 아까운 게 아니더라. 차근차근 변화하고 싶고, 변화된 모습을 대중에 보여드리고 싶다. 그게 배우로서의 제 욕심이다.

Q. 지난 3월, 5년 연애한 아내와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신혼인데, 아내를 때리는 남편을 연기해야 해서 아내의 반응이 남달랐을 거 같다.
조현재: “잘했다”라는 격려의 말만 들었다. 드라마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고, 좋은 얘기들만 해주더라.
Q. 연기에 아내의 영향을 받는 편인가.
조현재: 아내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제게 북돋아주는 말을 잘 해준다. 아내가 제게 “뭐든 어울리는 얼굴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며 배우로서 다양하게 어울릴 수 있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늘 이야기해준다. 또 아내는 일반인이니, 연기자가 아닌 대중의 시선으로 어떻게 보나 궁금해 일부러 아내한테 시나리오를 읽혀보기도 한다. 아내가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읽는지 보고 작품을 결정한다.
Q. 결혼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현재: 가족이란 게 좋다. 전 원래 친구가 많은 타입이 아니다. 결혼해서 좋은 건, 늘 옆에서 이야기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녀말'을 하며 4개월간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제 드라마 끝났으니 여유롭게 아내와 맛있는 걸 먹고싶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좋다. 그래서 자식이 많으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결혼하고 갖게 됐다.
Q. 2세 계획도 갖고 있나?
조현재: 당연히 있다. 좋은 소식 빨리 알려드리겠다.
Q. 내년이면 나이 마흔이다. 불혹을 앞둔 심경은 어떤가.
조현재: 배우로서 나이 먹는 게 좋고, 잘 늙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 나이대로 보이는 게 좋은 거 같다. 굳이 성형을 해서 외모를 어려지게 하기 보단, 그 나이대에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을 만나고 싶다. 나이 먹는다는 느낌이 좋다. 저 스스로도 '아저씨'가 어울린다고 본다.
[사진제공=웰스엔터테인먼트]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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