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경윤 기자] 누군가는 이 작품을 스릴러라고 하고, 누군가는 미스터리라고 한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를 보고 극장을 나선 뒤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은 사람에 대한 깊은 고민이다.
2012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온 '블랙메리포핀스'는 올해 새로운 시도를 택했다. 하나의 사건을 네 명의 인물 시선으로 각각 풀어내는 '올라운드 시즌'이다. 한스, 헤르만, 요나스, 안나. 같은 사건이지만 누구의 기억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처럼 보인다.
'한스 버전-메리포핀스 살인사건을 위한 변호'는 평일 오후 공연인데도 입소문을 탄 작품인 만큼 관객석이 대부분 채워졌다.
1926년 독일. 화재로 무너진 저택, 사라진 보모 메리 슈미트, 그리고 기억을 잃은 네 남매. 작품은 범인을 찾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얼마나 기억을 왜곡하는 존재인지, 상처는 어떻게 삶을 지배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무거운 소재에도 극 초반은 의외로 따뜻하다. 메리와 함께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동화처럼 사랑스럽다. 배우들의 호흡도 자연스럽다. 공연 중 요나스의 멜빵이 갑자기 끊어지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도 배우들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연기를 이어갔고, 객석에서는 긴장감 속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안에서도 살아 있는 공연만의 묘미였다.
기억을 잃은 이유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극장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심리극으로 변한다. 나치 정권 아래에서 진행된 인간의 무의식 조종 실험, 반복된 최면, 기억을 잃어버린 아이들. 그리고 끝내 밝혀지는 참혹한 진실은 예상보다 훨씬 무겁다. 작품은 자극적으로 비극을 소비하지 않은 채 인물들이 그 기억을 견디는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배우들의 열연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한스 시몬 역의 박정원은 명예를 회복하려는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김경록은 예민하면서도 불안정한 헤르만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했고, 이재림은 가장 평범한 삶을 꿈꾸지만 가장 큰 상처를 품은 안나의 감정을 절제된 연기로 전달했다. 정지우는 트라우마로 공황장애를 앓는 요나스의 불안을 현실감 있게 표현했고, 안유진은 사건의 중심에 선 메리 슈미트를 미스터리하면서도 인간적인 인물로 완성했다.
무대는 단출하다. 거대한 세트보다 조명과 배우들의 동선, 음악으로 긴장감을 만든다. 그래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표정과 호흡에 집중하게 된다. 화려함 대신 밀도 높은 심리극을 선택한 연출이 오히려 작품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블랙메리포핀스'는 한 번의 관람으로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작품이 아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인물의 기억을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이번 시즌이 네 개의 버전을 준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 남매는 기억을 다시 지울 것인지, 고통을 안고 살아갈 것인지 선택한다. 그리고 결국 불행을 없애는 대신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블랙메리포핀스'는 그 단순하지만 묵직한 질문을 관객에게 남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막이 내려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한편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는 서울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한스 버전은 오는 7월 12일까지, 헤르만 버전은 7월 17일부터 8월 9일까지, 요나스 버전은 8월 14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다. 완결판 '안나의 방'은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관객들과 만난다.
* [틱틱붐]은 뮤지컬 '렌트'를 남기고 요절한 비운의 천재 작곡가 조나단 라슨의 유작 '틱, 틱... 붐!'에서 따온 코너명입니다. 공연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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