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4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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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삼성·LG 창업주, 알고보니 같은 학교 출신…'재벌 산실' 진주 지수초의 비밀

작성 2026.02.13 15:50 조회 636

꼬꼬무 찐리뷰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2일 방송된 '부자의 탄생-창업천재마을'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개그맨 고명환, 변호사 서동주, 인플루언서 이사배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회장님들의 학교

때는 2014년. 경남 진주야. 당시 공무원이었던 이충도 씨는 어느날 후배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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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제 도청에 근무할 때인데 어느 날 갑자기 후배 친구 하나가 '선배님, 지수초등학교가 민간에 매각이 된다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죠. 그래도 역사적 공간인데, 정말 역사적 현장인데 이걸 가져다가 우리가 매각 하면 안된다..."
-이충도, 지수초등학교 졸업생

지수초등학교는 이충도 씨의 모교야. 그런데 이제 영영 사라질 위기에 놓인 거지. 여기가 바로 지수초등학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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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눈에 띄는 게 있어? 좀 낡고 휑해 보이지? 사실 이 학교는, 이충도 씨한테 연락이 오기 5년 전인 2009년에 이미 폐교된 상태였어. 농촌 인구가 줄어서 다니는 학생이 너무 없었거든. 그렇게 덩그러니 빈 학교 건물만 남아있으니, 땅을 그냥 두기 아깝잖아. 도 교육청에서 활용할 방법을 찾다 결국 민간 매각을 결정한 거지.

이충도 씨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가 사라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단지 이 학교 졸업생이라서가 아니라, 이 곳이 가진 남다른 역사 때문이야. 옛날엔 이 학교를 사람들이 '재벌의 산실', '회장님들의 학교'라 불렀대. 이 학교 출신 중에 성공한 기업가가 한둘이 아니라는 거야. 어느 정도 기업이냐? 바로 삼성과 LG. 둘 중 하나도 아니고 두 기업의 창업주, 이병철, 구인회가 함께 학교를 다녔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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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야. 네가 한번은 가봤을 편의점, 주유소 브랜드. GS일가도 줄줄이 이 학교 출신이야.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서울 명문 초등학교가 아니라, 경남 진주의 이 작은 시골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야. 이충도 씨는 이 학교가 기억되고 연구돼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때, 한 남자가 이충도 씨 앞에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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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을 맡고 있는 정대율 교수입니다. 지수초등학교가 1921년에 설립돼서 100년이 넘은 학교거든요. 구인회 회장, 이병철 회장, 이런 분들이 졸업했다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기업인이 나왔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좀 밝히기 위해서 승산마을 지수초등학교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하게 되고, 아마 승산마을에 제가 간 것만 해도 한 100번 이상은 갔지 않나 싶습니다."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정대율 교수도 이 마을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가본 건 처음이었어. 하지만 둘러보자마자 이곳을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야. 어떻게 그 엄청난 재벌들이 이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게 된 건지. 무엇이 그들을 기업가로 만든 건지. 그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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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로 엄청난 유산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조사해 보니까 진주 출향 기업인이 300명 이상 글로벌 기업인들이 나왔습니다. 삼성, LG, 효성,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SK 손길승 회장, 넥센 강병중 회장이라든지, 대교 강영중 회장이라든지. 한 공간에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나왔을까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서 그래서 '뭔가 이분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있을 것이다, 원류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여기서부터 내가 앞으로 모든 인생의 상당 부분들을 바로 여기에 올인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때부터 제가 연구를 엄청 열심히 했습니다."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이제부터가 진짜야. 진주가 품고 있던, 기업가 탄생의 비밀은 뭘까. 그리고 지수초등학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게.

▲ 승산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1922년이야. 일제강점기이자 3.1만세운동 직후. 지수초가 있는 경남 진주시 지수면으로 가볼게. 진주시는 경남 서부권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그중에서도 지수초가 있는 지수면은 어디냐, 함안과 의령에 닿아있는 진주의 동북쪽 끝자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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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면에서도 지수초가 있는 곳은 승산마을이거든. 마을은 이렇게 생겼어. 산 아래 대궐 같은 한옥들이 쭉 늘어서 있어. 딱 봐도 부내가 나는 마을이야. 당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부자마을'로 한양까지 소문이 났을 정도였대.

"조선시대에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 한양이고 그다음에는 평양이고 그다음은 남쪽은 진주였거든요. 그래서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 그만큼 한양의 많은 명문 세도가들이 승산마을의 부자들과 서로 혼맥을 이어서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들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고요."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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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 있는 학교가 바로 지수초등학교야. 그땐 '지수공립보통학교'라고 불렀어. 지수공립보통학교는 1921년에 세워졌어. 그때까지만 해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처음 생긴 거지. 근방에 하나뿐인 학교라 진주 전역은 물론이고, 근처 의령, 함안에서도 이 승산마을로 유학을 올 정도였어.

"진주의 강남이라고 볼 수 있죠. 사실은. 인근에 많은 명문 가문들의 자제들이 여기에 유학을 와서 공부를 했는데 일반인들은 다닐 수가 없고 그래도 최소한 뭐 천석꾼 정도 하는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거죠."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그렇게 유학을 온 아이 중에 이병철이라는 소년도 있었어. 바로 삼성의 창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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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현 삼성 회장의 할아버지이자, 가요계를 올킬하고 있는 그룹 올데이 프로젝트 멤버 애니의 외증조부야.

소년 이병철은 승산마을 옆 의령에서 나고 자랐어. 천석꾼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어. 천석꾼이면 1년에 쌀 천 석을 거두는 집안이라는 뜻이야. 지금 가치로는 백 명 이상의 소작인을 책임질 수 있는 지주 정도로 볼 수 있어. 이병철은 서당 훈장인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다 진주에 신식 학교가 생겼다는 소식에 옆 동네로 유학을 간 거야. 마침 시집가서 승산마을에 정착한 누나가 학교 앞에 살고 있었거든.

그렇게 1922년, 이병철은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으로 들어가. 그때 병철의 나이는 열세 살. 전학을 가기 위해 병철이 제일 먼저 해야 했던 게 있어. 당시 유교보이의 상징, 댕기머리를 자르는 거야. 신식 학교 입학 조건의 하나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거였거든. 새로운 교육을 받겠다는 의지로, 이병철은 과감하게 머리를 자르고 학교에 들어갔어.

그해에 이병철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구인회라는 소년이야. 지금의 LG를 만든 장본인. 학년은 같았지만, 구인회는 이병철보다 세 살이 많았어. 그땐 나이가 달라도 한 학년에 다니는 일이 흔한 시절이었어. 심지어 구인회는 당시 유부남이었어. 일찍 결혼하는 조혼 풍습이 남아있던 때라서, 학교 들어오기 전 열네 살에 이미 결혼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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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초등학교 총동창회에 자료를 보면, 당시 만들었던 출석부가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 구인회 회장이 같은 출석부에 나와 있고. 지수초등학교에 지금 보면 '부자 소나무'라고 있거든요. 그게 100년이 넘었습니다. 학교 개교를 기념하기 위해서 인근에 야산에 가서 소나무를 뽑아와서 심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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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이병철과 구인회가 1922년에 같이 심은 소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거지. 이 소나무를 부르는 이름이 바로 '부자송' 부자 소나무야. 두 소년이 대기업 회장이 된 후에 붙여진 이름이겠지? 실제로 부자 기운 좀 받겠다고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대.

그런데 함께 공차며 운동장을 뛰놀던 두 소년의 동문수학은 길지 않았어. 병철이 지수공립보통학교를 한 학기만 다니고 서울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거든. 그리고 정확히 35년 후,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 그사이 인회와 병철은 어떻게 '회장님'이 되는지, 그 스펙터클한 히스토리를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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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 천재 구인회

의령이 고향인 병철과 달리, 인회는 진주 토박이야. 인회네 집은 천석꾼, 만석꾼 하는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대신 명문가 자제였어. 할아버지 스펙이 장난 아니거든. 그 어렵다는 대과에 급제하고, 무려 홍문관 교리까지 지낸 양반이야.

"그때 당시에는 홍문관 교리가 가장 중요한 벼슬 중에 하나죠. 교리라는 것은 왕뿐만 아니라 왕자들을 가리키는 선생님이죠. 홍문관 교리가 됐다는 것은 정말로 명문 가문 집안이 아니면 못합니다."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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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말해 중앙 무대에 계신 거죠 한양에. 한양에 계시면서, 나라가 이렇게 되니 나라 잃은 신하가 어떻게 거기서 그걸(관직을) 하겠냐 하면서 낙향하시고 문을 걸어 잠그신 거죠."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조선 말기, 백성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조정은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어. 인회의 할아버지, 구연호는 아무리 상소를 올려도 달라지는 게 없자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승산마을로 돌아온 거야. 그리고 얼마 후 장손 구인회가 태어나.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남달랐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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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양정재에서 구인회 회장이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각별했죠. 더욱이 또 장손이기 때문에 장손이 잘 돼야 그래도 우리 집안이 또 사는 거니까…"
-구자표, 능성 구 씨 27대손

지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구인회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대. 입학하자마자 교내 독서클럽에 가입해서 동서고금의 유명 서적들을 탐독했대. 그런데 열심히 공부한 구인회는 이후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승산마을로 돌아와. 그 시절 장남들은 부모, 형제를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거든.

"그때 나이로 따지면 열여덟 정도인데 지금은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열여덟, 열아홉, 스물은 대단히 어른입니다. 고향을 지켜야 된다는 건 구인회 회장의 가장 큰 미션 중의 하나죠. 사실은."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그런데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와 보니, 낯선 풍경이 펼쳐졌어. 사람들이 전부 한 곳에 가서 물건을 사는 거야. 바로 동네 상인이 아닌 일본 상인이 운영하는 가게였어. 고무신이며, 옷감, 비누같은 생필품 판매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어.

"저러면 일본인 배만 불리고. 우리는 더 가난해지는 거잖아."

이 상황이 못마땅했던 인회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 나 혼자 사면 비싸지만 여럿이 사면 싼값에 살 수 있는 것, 바로 공동구매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갔지? 구인회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설득했어. 우리가 대량으로 생필품을 구매해서 일본 상인보다 싸게 팔면 되지 않냐고.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일본 상인에게 사는 것보다 싼값에 물건을 구할 수 있었어.

1929년, 구인회는 지수협동조합을 조직하고 이사장까지 맡게 돼. 그러면서 자연스레 '장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거지. 그래서 스물다섯이 되던 해. 구인회는 승산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해.

"할아버님, 아버님. 저는 여기보다 더 큰 진주 시내로 가서 장사를 해보겠습니다."

딸린 자식들과 형제들, 부모, 조부모까지 건사하기 위해선, 돈을 더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집안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어. 혹시 '사농공상'이라고 들어봤어? 선비, 농부, 장인, 상인 순서로 계급을 매겨놓은 일종의 신분제 같은 거야. 한마디로 가장 높은 계층인 선비 집안 장손이, 가장 낮은 계급인 상인이 되겠다고 파격 선언을 한 거지. 하지만 100년 전 '원조 테토남' 구인회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

"할아버님, 집안 형편이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장사라도 해서 아우들 공부시키는 데 힘이 되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고민에 빠졌어. 손자의 마음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유교 명문가로서, 주변의 시선도 무시할 순 없잖아. 그럼 집안 어른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어느 날, 아버지가 구인회를 불러. 그리고 이걸 내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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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돈 2000원이야. 지금으로 치면 1억이 좀 넘는 금액이래.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대. "세상을 얕보지 말고 남과 화목하게 지내고 신용을 얻고 사는 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어른들께서 믿어주신 거죠. 내가 너를 믿는다는 거는 참 쉽지 않은 표현인 것 같아요. 아무리 손자고 아들이지만. 내가 너를 믿으니 잘해보라, 그것만큼 큰 응원이 있었을까요? 그런 시절인데."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아마 이 분(구연호)도 나라가 망하는 걸 보고 세상이 바뀐다는 걸 어느 정도 감지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게 사농공상의 체제는 무너지고 새로운 어떤 시대가 온다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구인회는 바로 아래 동생 철회에게 동업을 제안하고 1800원을 더 모았어. 그렇게 구인회의 첫 사업 자본금은 3800원. 지금으로 치면 약 2억 원의 돈이야. 넉넉하진 않았지만 구인회에겐 천금 같은 돈이었어. 그리고 1931년, 구인회는 진주 시내에 바로 가게를 열었어. 사진을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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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진주 중앙시장이야. 1884년부터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엄청 유서 깊은 곳이지. 진주는 조선시대부터 경남 행정의 중심지였어. 당시만 해도 경남도청이 진주에 있었거든. 자연스레 상인들도 진주로 모여들었어. 생활용품, 의류, 먹거리까지 없는 게 없어서 경남 최대의 곳간이라고 불렸대. 이런 곳에 구인회가 가게를 낸 거지.

구인회는 뭘 팔았을까? 바로 비단이야. 비단 도소매상 포목점을 연 거야. 왜 비단을 골랐을까? 여기가 행정중심지라고 했잖아? 관료들이 많은 곳에 교방 문화도 같이 발달하거든. 교방 문화는, 기녀들과 즐기는 음주가무를 말해. 진주시에는 당시 수백명의 기녀가 거주했다고 해.

그럼 구인회 상점 오픈 1년 성적, 어땠을까? 마이너스였어. 무려 자본금의 15%정도를 까먹었어. 쌀 100가마니가 1년 만에 날아가 버렸지. 구인회는 면목이 없는 상황이야. 형제들, 가족들 봉양하겠다며 투자금까지 받아서 사업을 시작했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아직 초창기니까 좀 더 버텨? 아님 접고 빠른 태세 전환? 구인회는 다시 고향 승산마을로 갔어. 그리고 이렇게 말해.

"아버지 땅을 저당잡히면 돈을 더 융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던 거지. 그런데 아버지는 땅문서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해.

"초반에 일이 잘 안된다고 주저앉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되든 안 되든 결판이 나지 않겠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한발 두발 발전해 나가도록 해라."

이런 가족들의 이해와 응원을 바탕으로, 구인회는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장사를 시작해. 고향 땅을 담보로 빌린 돈은 8000원. 이것마저 잃으면 온 집안이 거리로 나앉게 되는 거야. 구인회의 각오, 남달랐겠지? 이번엔 잘 됐을까?

하나, 둘, 단골들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1년, 2년 지나자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대박나. 여기에는 뭔가 특별한 비결이 있었어.아까 공동구매처럼 시대를 앞서간 구인회의 비결,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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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인물을 모델로 쓰셨다고 해요. 가장 인기있는 기녀에게 옷을 입혀주셨대요. 그러니까 그분이 모델이 된 거야. 소위 말해 '어느 집에서 그 한복 했어요?' 이렇게 된 거죠. 그러면 '구인회 상점에서 했는데요'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게 날로 날로 소문이 퍼지면서 '어? 나도 구인회 상점에 가서 한번 맞춰볼까?' '거기 주단을 내가 써 볼까?' 이렇게 되는 거죠."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일종의 PPL 같은 거야. 진주 최고의 기녀에게 비단옷을 협찬한 거지. 당대 최고의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셈이야.

이렇게 성공한 구인회는 승산마을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진주로 불러들여. 집만 산 게 아니야. 동생들도 불러서 진주에서 공부시켰어. 이제 장남 노릇도, 가장 역할도 제대로 하게 된 거지.

하지만 사업하면서 어떻게 웃는 날만 있겠어. 장사를 시작한 지 5년이 되던 1936년 8월이야. 쉬지 않고 쏟아지던 비는 끝내 일을 내고 말아. 사상 최악의 홍수가 진주를 덮친 거야. 이른바 '병자년 진주 대홍수'. 시시각각 불어난 남강물에 집도 건물도 잠기기 시작해. 금세 초가집 지붕들이 물에 둥둥 떠다녔어. 그 물난리 속에서 구인회는 어떻게든 비단 한 필이라도 구해보려고 애를 썼어. 옷감들이 물에 젖으면 팔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비단은 커녕, 목숨도 건지기 어려운 상황이야. 비단을 내버리고 급히 대피한 덕에, 구인회의 가족은 모두 무사했어. 하지만 진주 전역이 폐허야. 병자년 대홍수에 남강 물길이 바뀌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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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시내 전체가 물바다가 다 됐거든요. 그래서 구인회 상점도 물에 잠겨서 100% 망했죠. 왜냐하면, 이게 포목점이 그냥 소매점이 아니고 도매니까, 엄청나게 많은 비단을 창고에 갖고 유통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고 볼 수 있죠."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비단을 다 잃었어. 이번에야말로 업종을 바꿔야 할까? 다른 포목상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어. 그런데 구인회는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다시 비단을 샀어. 이번엔 그동안 쌓아둔 것보다 더 많이 샀대. 이유가 뭘까?

"그때 그분이 생각하신 게 뭐냐면, 홍수가 나니까 흉년이 들 건데. 근데 흉년 이후에는 풍년이 무조건 든다…"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통찰력을 갖고 계셨던 거죠. 예측이 대단히 중요하죠. 이게 비단 가격이 어느 정도 올라갈 것이라는 시점이 있거든요."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흉년이 지나면 반드시 풍년이 온다, 살 수 있는 대로 비단 포목을 다 사들인 거야. 그 결과는, 구인회가 예측했던 대로 다음 해에 풍년이 왔어. 다들 기뻐했고, 인회는 특히 더 기뻐했어. 그 시절 소득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결혼'을 많이 했어. 결혼하는 사람이 늘면 아이도 늘고, 옷 지을 일이 많아. 포목 사업도 대박나는 거지.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다고 하잖아? 구인회는 홍수로 입은 피해보다 훨씬 더 큰 수익을 얻었어.

여유가 생긴 구인회는 이제 신제품 개발에 나서. 단순히 물건을 떼다가 파는 게 아니라, 광목에 무늬를 박거나 비단에 문양을 얹어서 다른 데선 구할 수 없는 '리미티드' 제품을 만드는 거야. 이러니 손님이 안 늘겠어?

그런데, 뭐든 다 되는 구인회 상점에 절대 안 되는 게 하나 있어. 바로 '디스카운트'. 절대 값을 깎아주지 않았대.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가격을 부풀리지도 않았어. 할인이 없지만 바가지도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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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가문의 자손인데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장손인데, 자기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고의 관직을 지내신 분인데 남을 속인다든지 이런 거는 그 사람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죠. '조금이라도 남을 속여서 판다' 이런 거는 구인회의 머릿속에 아예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동으로 신뢰를 얻게 되고 포목점이 번성할 수밖에 없었죠."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신문에는 이런 극찬 기사가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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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가 주단 포목 도소매 구인회 상점"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단연코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주단포목상 구인회 상점은 진주 상업계에 있어 자랑거리다. 점주 구인회 씨는 금년 30세의 젋은 상업가로 경제 동향을 잘 관찰하는 지략과 민활한 수완으로 시대의 유행을 살펴 고객의 취향을 맞추고 참신한 유행품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혹은 계절적으로 남다른 방법으로 양품을 풍부히 매입하고 신용을 바탕으로 저렴하게 판매하기에 사업의 기세가 확장되며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1937년 신문 보도 中

이렇게 성공한 조선인 사업가가 있다는 게, 당시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희망이 됐겠어. 구인회는 점차 진주의 유지로 자리잡았어. 구인회의 할아버지는 낙향 후 죽을 때까지 승산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단 한 번 시내에 외출한 적이 있대. 바로 손자 구인회가 비단 사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가게를 보러 간 거였대. 할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구인회는 또 어땠을까?

곧이어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드디어 만석꾼의 반열에 올랐어. 전쟁의 조짐을 알아차리고 엄청난 양의 광목을 사두었는데, 전쟁이 일어나 입을 것이 귀해진 거지. 옷감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거든.

사업이 이 정도 반열에 올랐어. 그럼 더 확장하거나 하겠지? 그런데 구인회는 포목 사업을 아예 접어. 그리고 진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 때는 1945년.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았거든. 이제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게 됐어. 진주가 좁다고 느낀 거야.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던 거지. 그럼 부산에 가서 뭘 했을까? 그건 잠시 후에 얘기해줄게.

▲ 제일 가는 이병철

구인회가 중일전쟁으로 큰돈을 벌었을 때, 이병철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었어. 이제부터는 병철의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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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은 지수공립보통학교를 한 학기만 다니고 서울로 전학을 갔다고 했잖아. 서울에서 고등 과정까지 밟은 이병철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온 후, 뭘 해야 하나 방황을 좀 했다고 해. 그러다가 이병철도 집안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해. 업종은 바로, 정미소야. 쌀을 도정해서 각지로 보내는 거지. 그럼 이병철의 첫 사업은 잘됐을까?

"그때 당시에는 정미소가 가장 큰 사업 중에 하나거든요. 농업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그래서 정미소를 해서 돈을 조금 모으고 그다음에 운수업을 합니다. 자동차를 몇 대 사가지고 운수업을 해가지고 거기서 많은 돈을 벌었죠. 그런데 사업을 좀 하다 보니까 은행과도 거래도 트고 하니까 은행에서 돈도 빌려주고 하니까 땅을 엄청나게 산 거죠. 그러다가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에서 모든 은행의 자금을 회수하니까 거기서 쫄딱 망한 거죠."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쫄딱 망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주변에 도움을 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어. 특히 이병철의 매형 허순구.

의령 출신 이병철이 승산마을에서 학교를 다닐 때, 시집간 누나 집에서 다녔던 거 기억나? 이병철의 매형 허순구는 승산마을 토박이 금수저였거든. 1930년대 진주에서 무려 백화점을 운영했을 정도야.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 느낌이야.

"이병철 회장은 허순구 선생이 없었으면 본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업을 일으키고 자금을 대는 핵심 인물이 허순구 선생이거든요."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병철은 심기일전해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 구인회가 처음 포목상을 시작할 때 자본금 얼마였는지 기억나? 맞아. 3800원. 그런데 이병철이 처음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자본금이 얼마였냐, 무려 3만 원. 지금으론 15억~20억 정도 되는 돈이야. 이병철은 1938년 대구 서문시장 인근에 250여 평 규모의 가게를 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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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삼성상회.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라고 할 수 있지. 무려 4층짜리 건물이야. 이병철은 청과물, 건어물, 생활용품 등을 국내는 물론 만주에도 공급했어. 그중에 가장 주력했던 상품은, 바로 '국수'야. 라면이 없던 그 시절, 국수는 전 국민의 소울 푸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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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면을 포장해서 판 거야. '별표국수'. 별 세 개 보이지? 그래서 삼성. 다른 국수들보다 좀 비쌌지만 맛있었다고 해. 당시 삼성상회 앞에는 별표 국수를 사겠다고 온 사람들의 이륜차, 자전거, 리어카들이 늘 줄지어 대기했대. 아마 국내 최초의 국수 오픈런 아니었을까?

▲ 든든한 조력자의 등장

이병철이 대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구인회는 부산에서 새로운 사업에 골몰하고 있었어. 당시 부산에서 우리나라 무역업등록 1호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지만,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그를 찾아와서 "내가 자네에게 투자하겠네. 자네는 내 아들에게 사업을 가르쳐주게"라고 말했어. 갑자기 등장한 이 사람 누굴까? 바로 이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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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정 선생.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야. 조선 최초의 '벤처캐피털리스트', '진주의 워런 버핏'으로 불려. 삼성, LG 못지않은 재벌기업 GS의 실질적인 창업주기도 해. 그런 그가 난관에 부딪힌 구인회에게 투자를 하겠다고 나타난 거야. 두 사람은 승산마을 이웃사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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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승산마을 지도를 봐. 구인회의 집, 허만정 선생의 집, 이병철의 매형과 누나의 집까지. 다 한 집 건너 한 집이었지. 게다가 구인회의 장인어른이 허만정 선생과 6촌 지간이었거든. 두 사람은 사돈 관계기도 해. 하지만 허만정 선생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한 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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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회장이 그 정도로 좀 뛰어났다.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게 눈에 아주 띄었기 때문에 허만정이란 분이 자기 셋째 아들을 맡기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구자표, 능성 구 씨 27대손, 현 승산마을 상동 이장

"LG라는 삼성이라는 기업에 자식도 투신하게 하지만 종잣돈을 또 대시는 그런 면모를 봤을 때는 그런 안목은 특출나신 것 같아요."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허만정 선생은 승산마을 만석꾼으로 유명했어.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대. 그가 구인회에게 거액의 돈을 투자한 건, 그만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겠지. 그런데, 안목이 남달랐던 허만정 선생은 이병철에게도 투자를 했어. 대구에 가서 삼성상회를 설립하기 전, 이병철은 허만정 선생을 찾아갔어.

"어르신 제가 이번에 만주와 조선을 잇는 무역회사를 세우고자 합니다. 여윳돈이 있으면 같이 사업을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흔쾌히 투자를 허락한 허만정 선생은 구인회에게 한 것처럼 이병철에게도 한 가지 부탁을 해. 자신의 장남을 사업에 참여시켜줄 수 있냐는 거지. 이병철은 당연히 받아들였어. 그렇게 허만정 선생은 LG와 삼성이 거대한 기업이 되기 전에, 두 창립자의 잠재력만 보고 투자했던 거야. 그럼 허만정 선생에겐, 투자한 만큼의 보상이 돌아왔을까?

▲ 허씨 가문이 돈을 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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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창립자 사이에 투자자가 등장했어. 그런데 이 가계도를 보면, 뭐 이상한 거 없어? 허만정, 허순구에, 구인회의 아내도 허씨야. 삼성 창립자 이병철과 LG 창립자 구인회 주변 인물에 허씨가 굉장히 많아. 사실 승산마을은 600년 전부터 김해 허씨 집성촌이야. 옛날부터 사이좋게 서로 돕고 지내서인지, 전반적으로 마을이 풍족한 편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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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우리 마을이 융성했을 때는 만석꾼이 두 집에다가 오천석 두 집, 이천석 좀 넘는 집이 두 집, 천석꾼은 한 7~8집 됐습니다. 그러니까 큰 마을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골 마을 치고는 엄청난 기업 부자들이 많이 살았죠."
-허성태, 김해 허 씨 23대손

이 가문에 대체 뭐가 있는 걸까? 예로부터 이 허씨 가문이 유명한 게, 겸손 그리고 검소야. 그 대표되는 인물이 바로, 허만정 선생의 아버지 허준 선생이야. '동의보감' 허준이랑 동명이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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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네에 만석꾼, 천석꾼은 많았지만 허준 선생 집은 가난했습니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언하면서 토지에 대해서 새로운 정책을 만들거든요. 본인이 둑을 막아 농지를 확보하면 본인 소유로 할 수 있게끔 했어요. 허준 선생이 토목이나 이런 데 상당히 지식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일대 강변에 범람하는 곳에 둑을 막고 농지를 많이 확보하셨죠. 아주 빠른 속도로 만석꾼이 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당시 만석꾼은 지금 대기업에 속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거의 300만 평 이상 되는 아주 큰, 진주, 하동, 남해, 고성 심지어는 창원까지도 여러 군데 논을 가지고 계셨죠. 그 정도 있어야 만석꾼이 되는 겁니다."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빠듯하게 살다가 벼락부자가 됐어. 그럼 남은 인생, 편하게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허준 선생은 부자가 된 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대. 심지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어. 마흔이 넘어 지방 고시인 '진사'에 급제해 승정원으로 일해.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주요 관직까지 올라갔다고 해. 고종의 최측근이었다고 해.

그런 허준 선생이 공부만큼이나 꾸준히 했던 게 있어. 바로 근검절약. 그런데 허씨 부자가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을, 물처럼 펑펑 쓸 때가 있었대. 바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었다고 해. 허준 선생이 어렵게 부자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땅을 나눠준 거야. 승산마을 근처에 사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200평씩 공짜로 줬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허만정 선생도 큰 가뭄이 들어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사람들이 생기자, 주저 없이 곳간을 열어 쌀을 석 되씩 나눠주기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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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어려울 때 쌀을 얻으러 가지 않습니까? 가을에 주겠다고 하고. 그럼 가을에 별 힘없는 사람들은 갚기도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그 쌀을 그냥 주면 마음 상할까 싶어서, 가까운 산에 가서 돌이라도 큰 걸 가지고 오면 쌀을 몇 말씩 주고. 그게 산이 크게 모여서 일명 금강산으로 불리는 곳이 지금 있거든요."

-허성태, 김해 허 씨 23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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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과 쌀을 바꿔준다니.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 그런데 궁핍한 이웃을 돕는 거 말고도, 허만정 선생이 아낌없이 돈을 쓴 적이 있어.

"원래는 일제강점기 때 일신고등보통학교라고 남학교를 세우려고 했는데 일제가 좀 탄압을 했답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여학교를 세웠는데..."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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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여고를 짓는 데 약 한 논 500두락, 500마지기 더 된다고 보죠. (학교 짓는 데) 15만 평 정도 논을 내신 거죠."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나라를 되찾으려면 아이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허 선생은 1925년, 많은 돈을 들여 진주에 고등교육기관을 세운 거야.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야. 사람들은 아마도 허씨 부자가 가장 많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쏟아 부었을 것으로 추정해. 허준 선생은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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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안희제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삼백'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어.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 백산 안희제. 백산 안희제 선생은 1914년에 부산 시내에 '백산상회'라는 회사를 하나 세워.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위장 기업인 셈이야. 이 회사를 세울 때 가장 많은 자금을 은밀히 지원한 사람이,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 선생, 그리고 진주 승산마을의 허준 선생이었대.

그런데 이 백산상회, 생각보다 사업이 너무 잘됐어. 서울, 대구, 안동, 원산 등에 지점을 두고 큰 성공을 거둬. 나중에는 백산무역 주식회사로 확대되는데, 이때 허만정 선생이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회사는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이었어. 백범 김구는 훗날 이렇게 말했대. 당시 임시정부 자금 중 60%를 백산이 조달했다고.

"백산 선생하고 허만정 선생 이 두 분이 거의 친형제처럼 같이 지냈습니다. 구인회 회장의 부친 구재서 선생도 그렇고, 독립 자금을 많이 대셨고, 민족정신 이런 것들이 대단히 투철하다고 볼 수 있죠."
-정대율, 경상국립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그런데 일이 커지면서 일본 순사들 귀에도 정보가 들어갔던 모양이야. 1927년 일본의 탄압과 견제로 백산무역 주식회사는 해체되고 말았어. 하지만 이때 허만정 선생은 사업의 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던 것 같아. 그게 앞으로 나라를 일으킬 청년 사업가 구인회, 이병철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던 거지.

1946년 허만정 선생은 구인회에게 투자를 약속하며, 셋째 아들을 경영에 참여시켜 달라고 부탁했잖아. 그때 아들에게 전한 말이 있어. "경영은 구 씨 집안이 알아서 잘 한다. 허 씨는 처신을 잘해서 돕는 일에만 충실해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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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동업을 하면 깨지는 이유가, 같이 경영에 참여하면 이견이 충돌하잖아요. 그러면 깨지기 쉬운데, 경영은 무조건 그쪽에 하고 너희는 그냥 따라만 줘라. 그만큼 인정을 했다는 거죠, 인정을."
-허성태, 김해 허 씨 23대손

당시 허만정 선생이 구인회의 사업에 투자한 금액은 총 자본금의 3분의 1정도였다고 해. 거액의 투자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 하는 건 쉽지 않지. 하지만 구인회가 동업에 필요한 상호 인정과 존중을 보여줄 거라 믿었던 거겠지.

▲ LG의 시작

구인회는 탄탄한 자본금을 토대로, 무섭게 사업을 확장해 나갔어. 포목점도 해보고, 무역업도 해봤던 경험으로, 구인회가 선택한 다음 사업은 바로 '크림'이야. 근데 예전에는 크림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어. 바로 동동구리무. 크림을 파는 상인들이 북을 동동 치며 호객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 1950년대 당시엔 국산 상품보다 훨씬 질 좋고 화려한 외제품이 쏟아지던 시기야. 사람들도 외제를 더 선호했어. 그럼 국내에서 만든 이 크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믿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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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눈에 띄는 포장에 공을 들였어. 서양 여배우 사진을 넣었고, 큼지막하게 상표도 영어로 달았어. 바로 '럭키'라고. 럭키크림이야.

발음도, 뜻도 좋다며 당시 회사 이름에도 이걸 넣었어. 한자로는 '즐거울 락. 기쁠 희'. 락희화학공업사가 탄생했어. 이게 바로 LG의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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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크림 잘 팔렸을까? 초대박이 났어. 부산, 경남 일대를 휩쓸고 서울까지 소문이 날 만큼 대성공을 거뒀어. 이 열풍에 힘입어 구인회는 바로 다음 사업에 착수해. 빗이나 칫솔, 비누통 같은 플라스틱 제품들이야. 이미 크림 통 뚜껑을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가 있었거든. 그걸 생활용품에 접목시킨 거야. 국내시장에 본격적인 플라스틱 시대가 열린 거지. 당시 구인회 회장은 이런 말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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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업자가 국민 생활용품을 차질 없게 만들어 내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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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 회장님의 사업 면모를 봤을 때는 내가 이걸 개발함으로 인해서 내가 이거를 탄생시킴으로 해서 우리 국민들,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이거를 입어서 혜택을 입어서 편하게 산다. 사회 공헌하겠다. 이게 좀 더 컸던 것 같아요. 사실. LG가 특히 최초 타이틀이 많거든요. 라디오, TV, 선풍기, 에어컨 정말 뭐 수없이 많아요. (유선) 전화기. 우리나라 1호는 많은 경우 LG예요."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한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이 기업의 시작인 거야.

▲ 무엇을 위한 기업인가

그럼 그때, 이병철은 어떤 사업을 벌이고 있었을까? 무역업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설탕, 그리고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 뭐가 됐든 제일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제품과 회사 이름에도 담았어. 그래 제일제당. 당시 이병철 회장의 사업 철학을 직접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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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첫째 국가에 도움이 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국가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조금 폭을 넓게 해서 인류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국민에 도움이 되어야 된다. 그다음에 인재, 인재를 기르고 인재를 교육시키고 하는 것이 거의 80%를 점유한다. 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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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창업자들은 어떤 마인드인지 모르겠는데 뭔가 오묘한 게 있어요. 내가 이걸 했을 때 나뿐만 아니라 나도 중요하지만 나 말고 타인부터 생각을 먼저 하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사업을 해서 내가 부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죠. 안 중요한 건 아닌데, 내가 이 사업을 토대로 내가 타인한테 공헌하겠다 생각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작게는 우리 가족, 아니면 우리 사회, 아니면 인류를 위해서."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자본주의에서 기업의 목표는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거야. 그런데 구인회 이병철 두 사람에겐 그보다 더 먼저 생각했던 게 있던 것 같아.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업인이 져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 거지.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거대한 글로벌 기업들과 수많은 기업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우리 브랜드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잖아. 하지만 종종 안타까운 뉴스가 들려오기도 해. 소비자를 기만하고 직원들을 사지로 내모는 기업들도 있어. 기업 이윤만 챙기고 사회적 책임은 나 몰라라 하는. 구인회 이병철의 초기 사업 마인드와 이런 기업 대표들의 마인드 차이는 뭘까?

한편, 닮은 듯 다른 듯 각자의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구인회와 이병철. 두 사람은 지수초등학교를 떠나 35년이 지난 1957년, 다시 한번 특별한 인연을 맺게 돼. 구인회의 셋째 아들과 이병철의 둘째 딸이 부부가 된 거야. LG와 삼성은 그 후로도 국내 최초 타이틀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경쟁자이자 파트너로 함께 성장해 나갔어.

그럼 이병철 회장, 구인회 회장과 함께 했던 허씨 가문 자손들은 어떻게 됐을까? 두 기업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알려져 있어. 이병철과 함께 삼성을 키운 허남정의 장남 허정구는 삼성물산 사장까지 올랐다가 독립했어. 구인회과 함께 시작한 셋째 허준구는 나중에 LG 부회장까지 오르게 돼.

구인회는 허준구의 형제들을 회사 운영에 참여시켜. 그리고 LG를 구 씨와 허 씨의 공동경영 체제로 만들었어. 그럼 두 가문의 동업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을까? 무려 57년. 창업주 때부터 경영 2세, 3세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두 집안은 큰 갈등 없이 함께 회사를 키워왔다고 해. 그리고 동업 57년 만인 2004년에야 두 가문은 서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해. 그때도 큰 잡음이 없어서 놀라워 하는 사람이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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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에서 분리된 GS그룹이 계열 분리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창업 1세대인 구인회 창업회장과 허만정 씨에서 시작돼 구본무 LG회장과 허창수 GS회장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구 씨 허 씨 가문의 57년 동업 관계가 마루리되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그리고 2004년, 한국 100대 부호 명단에 6명의 허 씨가 이름을 올렸어. 모두 허만정 선생의 자손들이야. 이들은 다양한 기업활동을 하면서 승산마을 허씨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옛날부터 속담에 3대 부자 없다고 하는데 지금 GS가 허만정 선생의 손자가 회장이 되었잖아요. 그럼 몇 대입니까? 완전히 속담을 깨뜨린 거죠. 그러니까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되는 겁니다. 기업인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정직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허성태, 김해 허 씨 23대손

▲ 지수초등학교의 비밀

그런데 지금까지 얘기한 기업가들이 어느 초등학교 출신이라고? 승산마을 지수초등학교. 그런데 오늘 얘기한 회장님들뿐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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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초 출신 기업인들 리스트야. 사회 전 분야 걸쳐 활동하는 기업인들이 정말 많지? 진주 승산마을을 오래 연구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업가들이 많이 탄생한 비결을 이렇게 얘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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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는 선대의 정신, 나눔과 베풂을 하는 마을의 기풍, 그런 게 서로 결합해서 이렇게 좋은 정신을 가진 기업인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나, 저는 그런 걸 좀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이충도, 현 지수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이분들이 또 좋은 일을 하셨는데 너무 드러내지 않으세요. 보통 우리 그렇잖아요. 내가 좀 뭐 좀 했다 좀 으스대고도 싶고 자랑도 하고 싶을 거 같은데 그런 걸 또 안 하세요. 그러기도 하고 너무 또 잘 지내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런 거 보면, 아 좀 배울 점이 많구나."
-유문선, 진주시청 관광진흥과 학예연구사

사람들이 얘기한 비결이란,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구체적인 방식이나 기술이 아니야. 바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원칙이었어. 그리고 이게 이충도 씨가 학교를 지키려던 이유이기도 해.

그럼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지수초등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누군가는 공장이 들어설 거다, 누군가는 아파트가 들어설 거다, 소문이 무성했거든. 지금 그 자리에 뭐가 들어섰는지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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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기업가정신센터. 지수초 건물은 매각되지 않았어. 부자송 나무도 그대로 있어. 2018년 한국경영학회에서는 진주시를 '대한민국 기업가정신 수도'로 선포해. 그리고 진주시가 지수초를 매입해 2022년 'K-기업가 정신센터'로 재탄생시킨 거야. 진주에서 성장한 기업인들의 정신을 더 알리기로 한 거지. 진심으로 마을과 학교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했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였어.

"매각을 막은 거죠. 이 학교의 소유권이 경상남도교육청에서 진주시로 바뀐 거죠. 그래서 이 학교가 보존이 되게 되었습니다."

-이충도, 현 지수초등학교 총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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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GS, 삼성, 효성, 그 창업주들이 서로 공부를 같이한다든지 교우를 같이 한,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이 장소는 대한민국 경제의 산실이다,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우국애민, 사업보국, 인재 양성이라는 그런 가치관의 뿌리는 유학자이셨던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 유학의 정신 즉, 경의 정신, 또 실사구시의 정신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 수도 선포를 계기로 그 정신을 현 세대가 이렇게 공유하고 그 정신을 미래 세대에 전달하기 위한 시설로서 진주 K-기업가정신센터와 재단이 완성이 된 겁니다."
-조규일, 진주시장

꼭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더라도, 굴지의 기업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많은 거 같아. 기업이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한번쯤 돌아보면 좋지 않을까. 어떤 목표를 향해 삶을 꾸려가는 우리 모두는 각자 인생의 CEO이기도 하니까.

평생 구두쇠였다는 허준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돌에 새겼어. 바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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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선생은 이 비석에 자신의 재산을 가족과 친척들은 물론, 학교를 세우는 데, 그리고 궁핍한 자들에게 나누겠다고 새겼어. 사람이 올바르고 투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잖아. 한 가문을 풍요롭고 평화롭게 운영해 온 그에게 중요한 건,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 잘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 있는 자세 아니었을까. 기업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국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생각이 더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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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는 진주 K-기업가 정신을 확산하기 위해서 청년포럼, 국제포럼도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제2의 구인회, 제2의 이병철이 될 수 있는 그런 정신적인 용기,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부여하고자 하는 게 저희 목표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규일, 진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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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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