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토)

영화 스크린 현장

[스브수다] '대도시의 사랑법' 노상현, 예사롭지 않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4.10.15 15:18 수정 2024.10.18 10:11 조회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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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현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노상현에게선 조급함을 느낄 수 없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배우들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자신을 어필하고, 포장하기 마련이다. 이 배우에게는 그런 초조함과 다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되레 몸에 뵌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인상적이었다.

모델 활동을 하다 배우에 도전한 노상현은 2017년이 되어서야 영화와 드라마 등 매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알려진 건 2022년 공개된 애플TV+의 시리즈 '파친코'가 결정적이었다.

노상현은 20대 후반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시작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속도에 연연하지 않는다. 늦깎이 배우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본인의 성격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배우의 꿈과 포부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여 인상적이었다.

대도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감독 이언희)은 근래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잘 만든 멜로 드라마'였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 속에서 교감과 이해에 이르는 두 남녀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달궜다. 무엇보다 '나 다운 나로 살아가기'라는 주제로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며 근사한 제목에 걸맞은 화두를 던졌다.

남자 캐릭터 '흥수'를 연기할 배우는 중요했다. 상업 영화에서 흔치 않게 다뤄지는 성소수자 캐릭터였던 만큼 많은 배우의 손을 거쳐 갔다. 상업 영화에서 이 캐릭터를 구현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배우들은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 누군가의 주저함과 거절이 있었기에 '신인' 노상현에게 기회가 갈 수 있었다.

"저 역시 흥수를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문제가 안된다 생각이었어요. 어떤 시선들 때문에 거절하고 싶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흥미로웠고, 캐릭터가 재밌었어요. 소재와 설정, 스토리 모두 신선하다고 생각했어요.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데 캐릭터의 어떤 특징 하나 때문에 망설일 필요는 없었죠"

노상현

'대도시의 사랑법'을 관통하는 대사가 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

대학교 같은 과에 입학하며 만난 재희와 흥수는 남과는 다른 서로를 알아본다. 두 사람은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다. 흥수는 그것을 애써 감추려고 하고, 재희는 자신을 과장하는 방식으로 결핍과 외로움을 숨기려고 한다.

"흥수는 성장 과정에서부터 이해받지 못한 억눌린 감정이 많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고립감, 억울함, 수치스러움 등 응축된 감정들도 많았겠죠. 자신의 엄마도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을 유일한 친구인 재희가 이해해 주고 상처까지 어루만져 주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고 성장해 나가요. 흥수는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마음을 닫고 살기도 하는데 재희와 있을 때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고 감정 표현도 많이 해요. 흥수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표현해 나가는 과정이 무척 좋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캐릭터도 좋았고요"

노상현은 캐릭터의 내면을 이해하고 연기하기 위해 촬영 전 성소수자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취향은 코어에 근접한 가치잖아요. 성별과 피부색을 바꿀 수 없듯이 취향도 바꿀 수 없어요. 그런 코어의 정체성 중 하나를 거부당했을 때 오는 수치심은 굉장히 클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큰 아픔이고 상처가 됐을 거고요. 성소수자들을 만나면서 더욱 몰입이 됐어요. 그들의 감정과 스토리를 들으면서 더 진심으로 연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문제라서 훨씬 더 진지하게 임했어요"

노상현

재희를 연기한 김고은과의 호흡도 흥수의 캐릭터가 생동감 있게 완성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촬영 전부터 친분을 다지며 촬영장에서도 흥수와 재희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살리고자 했다.

"재희의 집에서 첫 촬영을 시작했어요. 전날 술을 잔뜩 마신 흥수와 재희가 해장용으로 끓인 찌개를 한 입 맛본 뒤 눈빛을 교환하고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오는 신이었어요. 말없이 서로 통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장면인데 실제로도 자연스럽게 연기가 나왔어요. 우리 둘의 호흡이 정말 좋다고 느낀 순간이었죠"

노상현은 이번 영화에서 많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상업영화에서 다소 전형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민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그는 영화에서 가장 애정 가는 장면을 두 개 꼽았다.

"재희가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에요. 흥수가 재희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시발점이죠. 흥수는 그 말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을 위로받고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또 중반부에 등장하는 흥수와 흥수 어머니와의 해프닝 장면이에요. 흥수로서는 큰 용기를 내 엄마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한 건데 그 후 엄마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상황이었어요. 늦은 시간까지 엄마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다가 목욕탕에서 발견하고 오해를 하는 장면인데...슬픔과 웃음이 교차하는 장면이지만 시나리오에서부터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연기하지 않으면 관객의 마음을 사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노상현

'대도시의 사랑법'은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만큼이나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을 중요하게 다룬다. 흥수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아웃팅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생기고 그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이때 노상현이 보여주는 내면 연기는 인물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끔 한다.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가장 크게 와닿은 주제는 정체성이었어요. 정체성에 관한 주제로 흥수와 재희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있고, 이들이 성장하는 스토리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모두 하는 생각들이고,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어요. '내가 나답게 살고 있는지', '나다운 건 무엇인지'를 한 번쯤은 생각하고 고민하잖아요. 그래서 이 주제가 더 깊게 와닿았어요."

노상현은 경영학도에서 모델로, 모델에서 배우로 인생의 과정에서 전환을 거듭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캐나다 밴쿠버로 떠났고 고등학교는 미국 뉴욕에서, 대학은 보스턴에서 다녔다. 모델이나 배우로 전향하지 않았다면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려 경영 관련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류승범 선배의 연기를 보면서 배우라는 직업과 연기란 것이 매력적이고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이쪽 일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어요. 모델 일이었죠. 재밌었어요. 한국에 아예 들어와야겠다 생각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26살 때부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29살 때 군대를 다녀왔고, 전역 1년 후에 '파친코'에 출연하게 됐어요"

노상현

노상현이 생각하는 '연기의 매력'을 묻자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도 재밌고,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밌어요.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기보다는 '다른 일을 해볼까'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연기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 것 같고, 훨씬 더 많은 작품과 인물을 만나보고 싶은 갈증이 있어요"라고 답했다.

'파친코' 시즌1과 시즌2에서도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선자(김민하)의 인생에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난 이삭(노상현)은 선자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인물이었다.

노상현은 이삭을 따스함과 포용력을 갖춘 인물로 표현했고, 이는 시청자들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갔다. 다만 시즌2에서 이삭은 병색이 짙은 인물로 나왔기에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폭이 넓지는 않았다.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아픈 상태로 등장했고, 그런 모습을 연기로 보여줘야 했기에 "발성과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일부 지적도 나왔다.

이런 아쉬움을 언급하자 노상현은 "이삭이 죽어가는 상황이다 보니 대사를 똑바로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대본에는 이빨이 썩어가는 설정이 있었어요. 그걸 표현하기 위해 입안에 투명 교정기를 낀 상태여서 발음을 똑바로 하기가 어려웠고요. 제대로 하는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거죠. 이삭의 발음과 대사 톤은 오랜 고민과 상의 끝에 나온 결과예요"라고 해명했다.

노상현

그러면서 노상현은 "'파친코' 이후 쉴 새 없이 작품을 했는데 그 모든 경험들이 제겐 다 소중해요. 다 필요했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요. 매 작품이 도전이에요. 그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라고 말했다.

"작품을 하면서 얻는 것이 많아요.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보는 편이고 저만의 해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기 연습을 꾸준히 하고 있고 필요한 경우 개인 지도를 받기도 해요. 경력이 더 쌓이더라도 제 스킬을 성장시킬 수 있는 거면 계속해 나갈 것 같아요. 작품에 따라 결이 다르고, 감독님이나 작가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니까 그때마다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우는 유동적이야 하고 적응도 빨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희의 말을 빌려 "뭘 할 때 가장 노상현다운가?"를 물었다. 노상현은 "나한테 솔직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과 느껴지는 대로 사는 것, 저 자신을 믿으려고 노력해요. 살다 보면 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들고 그러다 보면 자신을 의심하기도 하고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쓸데없이 자책할 때도 있어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죠. 저 자신을 믿고 자신있게 살아가야죠"라고 말했다.

"어떤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가"는 질문에는 "이런 연기가 하고 싶다는 어떤 구체적인 것보다는 잘하고 싶어요. 굳이 말하자면 저만의 연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노상현의 차기작은 이병헌 감독이 연출하고, 김은숙 작가가 집필하는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니'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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