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4일(목)

영화 스크린 현장

[빅픽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마를 보았다

김지혜 기자 작성 2024.06.17 13:56 조회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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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의 첫 장면은 에두아르 마네의 명화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떠오른다. 청명한 하늘 아래, 푸른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한 가족이 있다. OST로 요한 트라우스 2세의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가 흐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단편적 감상을 넘어선 해석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목가적인 이 장면에도 보이지 않은 이면이 존재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1940년대,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 관사에 살던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다정한 아내, 토끼 같은 자식들이 아름답게 가꾸어진 집에서 살아가는 일상을 조명한다.

'밤과 안개',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쇼아', '피아니스트', '하얀 리본', '사울의 아들' 등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다. 가장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사울의 아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진 만행을 피해자의 시선으로 그린 영화라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를 관찰하며 다가간다.

존 오브

영국 작가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하지만 원작의 삼각관계 설정을 빼고 회스 가족 중심의 각색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났다.

회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 중령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책임자였던 실존 인물이다. 제목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독일어로는 'Interessengebiet')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반경 40m 안의 주변 지역을 뜻한다.

영화는 시·청각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혹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는 감독의 선택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찰과 배제의 대비를 통해 메시지를 강화한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의 경계는 명확하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회스의 사택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공존하지만 전자는 보여주고, 후자는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담장 안쪽에 위치한 회스의 사택과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듯 담는다. 대부분의 장면은 와이드 렌즈를 사용해 광각으로 담았다. 의도적인 거리 두기다.

회스 가족의 일상을 담기 위해 촬영 공간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숨겨놓은 뒤, 긴 테이크를 이어가는 방식의 촬영을 진행했다. 그 결과 헤트비히가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고, 루돌프는 소각로 기술자들과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장교들이 마당에 모여들고, 가정부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상황을 동시에 촬영됐다. 클로즈업은 인물이 아닌 꽃과 나무 등 사물에 집중돼 있다.

존

영화가 그리는 회스는 머리에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평범한 사람이다.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도 집의 안과 밖을 예쁘게 꾸미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주부로 등장한다. 야만의 세계로부터 차단된 채 살아가는 아이들은 천진난만하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뒷받침하는 설정과 인물묘사다. 악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회스 가족을 통해 구체화한다.

담장 너머의 공간은 분명 존재하나 의도적으로 배제됐다. 하늘로 치솟은 굴뚝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만이 보여진다. 미지의 공간에 대한 불길한 의심은 아우성과 총성, 기계음이라는 께름칙한 사운드가 쌓이며 점차 확신으로 변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면 없는 아우성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는 상상 이상이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굉음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는 회스의 가족들이다. 영화는 수용소를 아예 보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참상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은 일부러 중요하지 않게 다룬다. 회스가 아이들과 강가에서 물놀이를 할 때 아우슈비츠에서 떠내려온 뼛조각과 잿더미를 보고는 성급히 강가를 떠나는 장면이 짧게 등장할 뿐이다. 또한 대낮에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방에서 놀던 회스의 어린 아들은 그 소리에 창문을 바라볼 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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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위기는 회스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서 발발한다. 아내 헤트비히는 "평생 꿈꿔왔던 공간을 포기할 수 없다. 혼자 가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겐 지옥인 공간이 누군가에겐 천국이다. 히스테리컬한 헤트비히의 반응에서 광기마저 느껴진다.

인물들과의 거리 두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주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입신양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치와 '아우슈비츠의 여왕'을 꿈꾸는 장교의 아내뿐만 아니라 드림하우스에 입성한 딸을 보러 왔다가 도망치듯 떠나버리는 엄마, 어딘가 불편하고 불안해 보이는 유대인 하녀, 환경에 미묘하게 영향을 받는 아이들까지 인과 관계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사유하도록 한다.

한 가족의 홈드라마처럼 보였던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는 형식적 일탈을 통해 충격을 안기기도 한다. 열화상 카메라 장면이 대표적이다. 친절하고 따뜻한 아버지인 회스는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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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등장하는 장면은 동화 속 동화다. 한밤중에 어린 소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음식을 묻어두는 장면이 등장한다. 홀로코스트 당시 실존했다는 어린 레지스탕스 투사의 이야기를 시각화한 장면으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한 소녀의 목숨을 건 선의(善意)를 이기(利己)에 잠식당한 회스 가족과 대비시켰다.

엔딩에서 회스의 구토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일순간 영화는 극에서 다큐멘터리로 전환된 듯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때 관객들이 느낄 감정은 '숙연함'이다. 이 시퀀스를 통해 영화의 오프닝에서 2분 11초간 이어졌던 암전의 의미가 완성된다.

영화를 연출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영국계 유대인이다. 그는 자미로콰이의 '버추얼 인새니티'(Virtual Insanity)와 라디오 헤드의 '카르마 폴리스'(Karma Police) 등의 뮤직비디오로 명성을 쌓은 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비주얼 아티스트답게 '섹시 비스트', '탄생', '언더 더 스킨' 등의 영화에서 시각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연출을 해왔다.

존 오브

'언더 더 스킨' 이후 무려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더라도 형식미가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메시지를 선명히 하는 시청각적 상징들과 은유들은 다소 직접적이지만, 빈틈없는 구성과 연출을 통해 각성과 사유라는 목적지로 관객을 인도한다.

특히 이미지 없는 사운드를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연출은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여타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방식이다.

이 같은 선택에 대해 그는 "철학자 질리언 로즈가 쓴 아우슈비츠에 관한 글을 통해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를 상상했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가해자 문화에 얼마나 가까운지 보여주고 싶었으며 마냥 차가운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들여다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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