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일)

스타 끝장 인터뷰

[인터뷰] '채비' 조영준 감독 "여성을 모성에 가두는 건 구태의연…"

김지혜 기자 작성 2017.11.16 14:47 수정 2017.11.16 15:12 조회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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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준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여성 캐릭터를 모성으로 한정 짓는 게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방송을 보고 나서 그렇게 생각해온 것도 선입견이겠구나 싶더라고요. 저런 모성이라면 누군가 이야기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 어머니에게 위안이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화 '채비'는 엄밀히 말하면 올드 패션(Old fashion)이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새로운 소재도, 이야기도 아니다. 영화의 줄거리가 제시되는 순간, 과정부터 결과까지 한눈에 그려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뻔한 이야기가 관객의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그 이유는 영화를 관통하는 인물에 대한 진심과 배려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 조영준 감독은 데뷔작 '채비'를 찍기까지 23편의 장편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20대 후반에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탓에 대부분의 작품은 생계를 위한 집필이었다. 그가 다른 감독이나 제작사에 팔지 않고 남겨둔 시나리오 중 한 편이 '채비'였다.

'채비'는 서른 살 몸에 일곱 살의 지능을 가진 인규(김성균 분)와 그런 인규를 혼자 두고 떠날 채비를 하는 엄마 애순(고두심 분)의 애틋한 감성 휴먼 드라마. 몇 해 전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등장한 사연이 영감의 원천이 됐다.

채비

"1급 중증 장애아들을 둔 80대의 노모가 생계를 위해 매일 아파트 계단을 청소해요. 아들이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일하는 곳에 데리고 나와요. 아파트 꼭대기 층 계단에 돗자리를 깔고 1,000피스 짜리 퍼즐을 던져 주고 놀라고 해요. 그리고 자신은 청소를 시작하죠. 그걸 수십 년째 하다 보니 아들은 퍼즐을 두 시간 만에 맞춰버려요. 반복된 행동으로 공간 지각 능력만 유달리 발달한 거죠.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영화 속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어요"

'채비'는 단편으로 제작될 뻔한 영화다. 처음에는 15분 내외의 단편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다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본 지금의 제작사를 만나 장편 영화로 규모를 키우게 됐다. 그 과정에서 죽음을 앞둔 노모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의 자립을 돕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장편으로 새롭게 이야기를 쓰면서도 어떤 극적인 장치라던가 반전 요소는 배제하고 싶었어요. 이 영화의 목표를 성과나 성장 서사가 아닌 '잘 살아가는 것'으로 잡았거든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실제 지적 장애아들을 둔 어머님을 여러분 만났어요. 그분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은 편견에 찬 사람들"이라고 하세요. 이런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인 돈 뜯어가는 조폭, 장애인을 시설로 보내는 나쁜 손길 등을 넣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은 치약과 샴푸도 구분 못 하는 장애와 싸워야 하는 현실적 상황이거든요. 대중에게 익숙한 장르적 장치를 넣는 건 최대한 배제했습니다."

'채비'는 고두심과 김성균이라는 배우를 만나면서 날개를 달았다. 특히 '국민 엄마' 고두심이 보여준 진정성 넘치는 연기는 영화의 강력한 소구점이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맨 얼굴, 신호등 색깔을 연상시키는 원색 의상까지 삶의 질곡을 그대로 보여준 고두심의 애순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는 '우리네 엄마'의 모습이었다. 

채비

조영준 감독 역시 "고두심 선생님이 이 영화에 출연하신다고 했을 때 꿈만 같았다"면서 "총 35회차를 촬영하면서 한 번도 안 빼고 같이 식사를 했다. 현장의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지적 장애인 인규를 연기한 김성균의 열연 역시 영화의 큰 축이 됐다. 조영준 감독은 "촬영 전 장애인 복지시설에 함께 가서 생활을 했다. 좀만 과장해 연기를 하면 희화화가 되고 너무 절제하면 톤이 다운될 여지가 있어서 그 접점을 찾는데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고 전했다.

'채비'는 신파를 자제했다. 눈물을 조장하는 인위적인 설정을 배제한 연출로 담백하고 담담하게 모자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누군가 "이 영화에는 왜 악당이 없어요?"라고 묻더라고요. 그런 설정이 갈등을 부각하는 극적인 요소가 될 순 있겠지만 애순에겐 죽음, 인규에게는 선천적 장애라는 막대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또 다른 적을 배치해서 가학적인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또 웃기거나 울리기 위해 캐릭터를 소비하면 안 된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요소가 섞여 있는데 한가지 모습으로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모티브로 삼은 실제 인물에게도 위안을 될 수 있게끔 한컷 한컷 공을 들이면서도 관객들도 모자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수위를 조율해나갔던 것 같습니다"

조영준 감독은 데이빗 핀처의 '세븐'을 인생 영화로 꼽을 정도로 스릴러나 범죄물 장르에 큰 애착을 가져왔다. 그러나 가장 어렵다는 드라마 장르로 장편 영화 연출 데뷔를 하게 됐다. 

조영준

"드라마 장르는 감독들이 조심스러워해요. 신인 감독에게 드라마 연출을 맡기는 경우도 잘 없어요. 이건 무기가 하나도 없이 맨몸으로 나와서 싸우는 거거든요. 편집으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의 연기와 영화의 분위기, 정서로만 승부해야 하니까요. 개봉 전 열린 블라인드 시사회에서 저희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모습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만들었던 단편 영화에서 관객을 웃기거나 놀라게 한 적은 있지만, 울린 건 처음이었거든요."

'채비'를 만들고 난 후 느낀 가장 큰 보람은 발달 장애 어머니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감사 인사를 받을 때였다고 했다. 

"영화 개봉 전후로 어머니들을 모시고 시사회와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열었어요. 영화 종영 후 극장 안에 들어가면 어머니들이 그렇게들 우세요. 그리곤 제 손을 꼭 잡고 "이런 영화 만들어줘서 고마워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더 고맙고 감동이었죠."

조영준 감독은 이 영화가 작은 계기가 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제도적 장치가 확충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인규처럼 스스로 자립하는 케이스는 극히 일부일 겁니다. 보호자 사후에 장애인들은 대부분 복지 시설에 보내져요. 어머니들은 탈시설을 주장하세요. 장애인을 배제하고 분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는 중요해요. 그럴려면 장애인들이 보호자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겠죠. '채비'를 본 관객들이 이 같은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제도의 개선과 확충을 촉구하는 데 힘이 돼줬으면 합니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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