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진료 마감 시간을 훌쩍 넘긴 병원, 초인종이 울린다. 의사 제니(아델 하에넬)는 인턴 줄리앙에게 "문 열어주지 마. 진료 시간 끝났어"라고 말한다.
제니에겐 지각 환자를 받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여느 날과 다름없는 퇴근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찰나는 일상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다음 날 형사가 찾아와 신원 미상의 한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됐다고 전한다. 제니는 경찰에 제출한 병원 CCTV에서 애타게 벨을 누르고 있는 한 흑인 여성의 얼굴을 본다. 제니는 끔찍하게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이름이라도 찾아주고자 발로 뛰기 시작한다.
다르덴 형제(장 피에르 다르덴, 장 뤽 다르덴)의 영화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 주요 컷을 형성한다. 인물은 어떤 사건과 맞닥드리고 반응한다. 그러나 그 액션들은 하나도 영화적이지가 않다. 감독의 눈인 카메라는 인물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거나(핸드헬드) 멀리서 관망(롱테이크)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화엔 인물의 감정과 결을 함께 하는 음악도 흐르지 않는다. 한마디로 과장이 없다.
1999년 '로제타'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하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떠오른 다르덴 감독은 벨기에의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으로 꼽힌다. 인간과 삶이라는 거대한 화두 안에서 실업, 빈곤, 인권 등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와 모순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매 작품 남다른 깊이로 감탄을 안겼지만, 최근에 들어선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할 수 있다. 보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화법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삶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키되 감정은 보다 깊고 넓게 파고든다.
전작 '내일을 위한 시간'이 연대의 힘을 강조한 영화라면,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은 죄책감과 책임감에 관한 이야기다. 절대적 가치라기보다는 상대적 가치다. 그렇게 하면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다. 그래서 주인공의 행동은 관객들로 하여금 딜레마를 빠지게 한다.
엄밀히 말해 주인공은 소녀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때 문을 열어줬다면?' 이라는 가정이 죄의식을 유발하겠지만, 그 죽음을 모른채해도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제니는 마음의 짐을 떨치지 않고 어깨에 매고 나아간다.
개인의 죄의식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제니의 발걸음은 오지랖과 민폐를 넘나든다. 진실을 밝힌다는 미명 아래 경찰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타인의 죄책감을 종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옳은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의문도 들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본성을 상기해본다. 불완전한 동물은 어리석음을 깨우치며 한 걸음 나아가고 성장한다. 물론 모두 다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되레 도태되기도 한다.
제니는 죄의식을 면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선을 추구해 나간다고 볼 수도 있다. 목적에 이르는 과정에서 적잖은 희생도 감수한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노운 걸'은 제니의 성장담이다. 인간다움을 향한 한 사람의 몸부림, 그 지난한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타인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한 과정은 결국 자신의 삶을, 주변의 인간을 돌아보게 했다.
좋은 영화는 답을 내리지 않고 질문한다. 다르덴 형제는 이번에도 관점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상영시간 126분,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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